매년 10월의 마지막 주에는 ‘인문주간’이 열린다. 2006년 처음 시작되어 올해 ‘제19회’를 맞은 ‘인문주간’은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 그리고 전국의 인문학 관련 기관이 함께 참여하는 대한민국 대표 인문학 축제이다. 인문학의 대중화와 인문학 가치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높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강연, 전시, 공연, 체험, 토크 콘서트, 답사 등 300여 개의 다채로운 인문학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인문주간이 시작한 첫해, 나는 대학에 입학해 인문학을 전공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문학은 늘 위기의 학문이었다. 그러나 인문학에 대한 큰 뜻을 품고 전공을 선택한 나는 문과대생의 필수 코스인 경영·경제 복수 전공을 하지 않고 사회에 진출했다. 졸업 후 바로 취직한 동기들이 사원에서 대리, 과장 등으로 승진하는 동안 유학을 가서도 인문학을 전공한 나는 몇 년 전부터 전공을 살려 경제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AI와 경쟁해야 하는 세상에 접어들었다.
마침 올해 인문주간의 주제는 ‘인공지능 시대의 인문학’이다. 인공지능의 중요성이 커지는 시대에 인문학의 역할을 탐구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통해 인사이트를 얻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온고지신으로 AI 시대의 인간에 대해 다시 묻다’라는 주제의 인문주간을 운영하는 숭실대학교를 찾았다.
인문주간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 전시 <영감, 흔적, 숭실>을 먼저 관람했다. 개교 127주년 및 서울숭실세움 70주년을 기념해 중동과 유럽의 고대부터 중세를 거쳐 종교개혁과 근대, 그리고 조선시대까지 진귀한 성서 원본 등을 전시하는 <해외 기독교 유물 특별전>이다. 인문학과 종교개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아드 폰테스(Ad fontes)’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인문주의 운동을 통해 라틴어로 된 성경 대신 원어 성경을 직접 읽으며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폈다.
설형 문자판과 파피루스, 중세 필사본, 인쇄술이 발달한 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 인쇄본, 조선 시대 최초의 성경 등 다양한 유물을 둘러본 후 강연장으로 향했다. 이화여대 포스트휴먼 융합인문학 협동과정 신상규 교수가 ‘포스트휴먼 시대, AI의 위협과 도전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AI가 가장 먼저 대체할 직업 1순위로 항상 꼽히는 분야에서 AI와 경쟁하기 위한 역량을 키우는 데 열중하던 나에게 강연은 새로운 관점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인공지능이 과연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인가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그런 질문 자체가 인간 중심적 편견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미 기술은 우리 삶의 일부이고 인간의 역사는 기술 발전 없이 진행될 수 없었다. 기술과 경쟁할 것이 아니라, 협력하여 최선의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더 나아가 AI 시대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윤리’이다. 알고리듬 기반 사회가 도래하면서 사회 구조나 행동 양식까지 인공지능 알고리듬의 영향을 받는다. 그런 가운데 AI 가이드라인과 윤리 강령에 그치는 게 아니라 개발 단계에서 윤리와 정치적 개입이 필요하다.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개선책과 책임 소재, 거버넌스 수립과 입법화 역시 요구된다.
여전히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함에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제거해야 할 경쟁자로 AI를 바라봤던 나에게 인간과 기계의 경쟁 서사의 극복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선사시대부터 인류는 기술을 활용해서 살아남았다. 사실 그렇게 멀리까지 갈 것도 없다. 컴퓨터와 인터넷은 우리의 생활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잘 활용만 한다면 이 컴퓨터와 인터넷은 우리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도구가 된다. AI라고 왜 안 되겠는가?
그렇다면 급변하고 있는 이 시대에 나는, 우리는 어떤 길을 가야 할까? 전시회에서 본 마르틴 루터의 독일어 성경이 그 답을 제시해 주었다. 각국의 언어로 직접 성경을 읽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번역한 성경은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에 힘입어 전 유럽에 퍼져나갔다. 그로 인해 종교개혁 역시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다. 즉, 인간만이 추구할 수 있는 진리와 지혜의 탐구, 그리고 협력자로서의 기술 이 두 가지가 결합될 때, 우리는 더 나은 세상과 미래를 꿈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