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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날리는 11월의 거리를 홀로 걷고 있을 것만 같은 시인

[문인의 흔적을 찾아서] 강원 인제 박인환 문학관

2020.11.12 이광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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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의 ‘박인환 문학관’.
박인환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의 ‘박인환 문학관’.

가을도 늦가을, 낙엽이 날리는 11월의 거리를 홀로 걷고 있을 것만 같은 시인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했던 시인, 가을과 그처럼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남아 있어’, 이런 시들을 읽어보면 시가 노래 같다. 박인희가 노래 불러서 더 그렇겠지만 우리의 옛 가사(歌辭)처럼, 말이 음(音)을 타고 흐른다.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는 말은 박인환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쓴 몇몇 시들에 아주 적합한 말이다. 시를 읽으면 입 속에서 노래가 되고 그 노래가 서늘하게 들려오는, 약간 우울하면서도 서정과 낭만이 넘치는, 그는 모더니스트였으되, 우리는 그를 이렇게 기억한다.

박인환(1926~1956)은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사무소 직원의 아들로 태어나 거기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서울로 왔다. 중학교 때 영화관을 출입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경기중학교를 중퇴했다. 아버지의 강요로 평양의학전문학교를 다녔다. 해방이 되면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다시 서울 집으로 온다. 스물둘에 종로3가 낙원동 입구에 시인 오장환이 운영하던 것을 인수한 서점 ‘마리서사(茉莉書肆)’를 열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마리’는 일본의 현대시인 안자이 후유에(安西冬衛)의 시집 <군함마리(軍艦茉莉)>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고, 프랑스 시인 마리 로랑생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얘기도 있다. 마리서사는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장 콕토 같은 외국 유명시인들의 시집과 ‘오르페온’, ‘판테온’, ‘신영토’ 같은 일본의 유명한 문학잡지들이 진열된 고급 서점이었다. 김광균, 김기림, 오장환, 정지용, 김광주, 김수영 등 여러 문인들이 자주 찾는 문학 명소가 되었고, 뒤에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의 발상지로 회자되기도 한다. 

문학관 1층과 2층에 조성해 놓은 해방직후 명동의 거리풍경. 당시 예술인들의 사랑방이었던 동방싸롱과 유명옥 등의 간판이 보인다.
문학관 1층과 2층에 조성해 놓은 해방직후 명동의 거리풍경. 당시 예술인들의 사랑방이었던 동방싸롱과 유명옥 등의 간판이 보인다.

박인환은 1946년 시 <거리>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에 들어간다. 1949년 김경린, 임호권, 김수영, 양병식 시인과 함께 ‘신시론(新詩論)’ 동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출간하면서 모더니즘 시인으로 각광을 받았다. 그의 고향인 강원도 인제읍 ‘박인환문학관’에 가보면 1, 2층에 해방 전후의 문학공간들을 잘 꾸며놓아 옛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유명옥’도 그 중 하나다. 시인 김수영의 어머니가 충무로 4가에서 운영했던 빈대떡집 유명옥은 신시론의 산실이었다. 신시론은 서정성을 대표하는 ‘청록파’의 전통적 자연 예찬에 대한 반발과 좌우익의 정치적 대립에 따른 불안, 서구문화의 유입과 급격한 도시화를 비롯한 해방이후 특수한 상황 속에서 30년대 임화와 김기림을 이은 후기 모더니즘 운동이다. 박인환은 그해 경향신문에 입사하여 대구, 부산으로 피난하면서 종군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시를 쓰고, 영화평론을 쓰고, 신문사 사회부, 문화부 기자로 일했지만 생활은 여전히 어려운 가난한 시인이었다. 부산에서 박인환을 비롯해 김경린, 김규동, 이봉래, 조향, 김차영 등 6명이 동인 ‘후반기’를 결성, 모더니즘 운동을 이어간다. ‘6인이 한 패가 되어 당시의 기성 문단과 문화계에 반기를 드는 문학운동을 폈는데 주된 공격은 낡은 전통문학, 이른바 구태의연한 서정주의 시 내지는 감상주의에 대한 것이었고, 문단 및 문화계의 왜소한 권위주의에 대한 도전이었다’ ‘후반기’ 6인 중의 한 명인 시인 김규동이 ‘박인환론’에서 쓴 내용이다.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했던 막걸리 술집 ‘은성’. ‘세월이 가면’이 탄생한 에피소드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유리창에 시가 새겨져 있다.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했던 막걸리 술집 ‘은성’. ‘세월이 가면’이 탄생한 에피소드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유리창에 시가 새겨져 있다.

1953년 그는 서울로 돌아온다. 그 시절, 폐허가 된 명동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연 다방 ‘모나리자’, 예술인들의 보금자리 ‘동방싸롱’, 위스키 시음장으로 문을 연 술집 ‘포엠’ 등이 그들의 창작공간이자 무대였다. 훤칠한 키에 수려한 얼굴의 박인환은 당대 문인 중에서 최고의 멋쟁이, ‘댄디보이’였다. 서구 취향에 도시적 감성으로 무장한 그는 시에서도 누구보다 앞서간 날카로운 모더니스트였다. 1956년 이른 봄. 명동 한 모퉁이에 자리한 막걸리집 ‘은성’. 탤런트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이 집은 가난한 예술가들이 문학과 예술의 꽃을 피우던 사랑방이었다. 송지영, 김광주, 김규동 등의 문인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백치 아다다를 불러 유명한 가수 나애심도 함께 있었다. 술잔이 돌고 취기가 오르자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하는데, 마땅한 노래가 없다고 거절했다. 그 때 박인환이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즉석에서 시를 써내려가고, 완성된 시를 넘겨받은 이진섭이 단숨에 악보를 그려갔다. 나애심이 그 악보를 보고 노래를 불렀다. 나중에 온 테너 임만섭이 합류하여 그 악보를 보고 다시 노래를 불렀고, 주위에 있던 모든 손님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 시 <세월이 가면>이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의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네. // 바람이 불고 / 비가 올 때도 / 나는 저 유리창 밖 /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네. // 사랑은 가고 / 과거는 남는 것 / 여름날의 호수가 / 가을의 공원 / 그 벤치 위에 / 나뭇잎은 떨어지고 / 나뭇잎은 흙이 되고 / 나뭇잎에 덮혀서 /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의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네 /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명동거리를 지나가는 댄디보이 박인환.
명동거리를 지나가는 댄디보이 박인환.

박인환은 1956년 3월20일 세상을 떠났다. <세월이 가면>을 쓴 지 일주일 뒤였고 시인 이상의 기일로부터 나흘 뒤였다. 이상을 유난히 좋아했던 그는 이상의 기일 3월 17일 오후부터 주위 사람들과 함께 추모하며 나흘간 통음을 한다.(이상의 죽음은 1937년 4월17일인데, 박인환의 착오이다) 그날 박인환은 옆자리에 있던 이진섭에게 ‘인생은 소모품, 그러나 끝까지 정신의 섭렵을 해야지’라고 메모한 것을 주었다고 한다. 향년 31세.

이어지는 김규동의 ‘박인환론’. ‘(목마와 숙녀) 시를 읽으면 고심참담하게 생활의 둑을 헤쳐 가느라고 방황하던 그의 모습이 연상되며, 허무하게 바라보는 시대의 지평이 보이는 것만 같다. …그는 우리 주변의 누구보다도 시의 사회성이나 역사성 문제를 자각하는 시인이었다. …서민성 내지 민중성을 획득하지 못했을 뿐 부조리와 인간 모순에 대한 회의와 감성은 대단히 날카로웠다. 그러기에 그가 좀 더 살면서 시를 썼다면 그 특유의 소시민적 비애와 고독을 벗어나 새로운 민족시의 광야에 나서게 되었을 것이다. …1956년 3월 우리는 그를 망우리에 쓸쓸히 묻었다.’  

이광이

◆ 이광이 작가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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