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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눈박이 등대의 슬픔

[김준의 섬섬옥수] 인천 옹진군 연평도등대

2020.10.12 김준 섬마실 길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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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꺼진 등대에 다시 불이 켜졌다. 저녁을 먹고 산책 삼아 다녀올 거리이다. 은하수를 보기 이른 시간에도 샛별은 등대에 개의치 않고 존재감을 뽐낸다. 풀벌레 소리마저 잦아드는 시간 등대는 조용하게 남쪽 바다를 비추고 있다.

인천의 팔미도등대, 부도등대, 선미도등대, 소청도등대 등이 일제강점기 만들어졌다. 하지만 연평등대는 전쟁 후 지어졌다. 젊은 등대지만 불빛도 크기도 모양도 다른 등대와 견주기 어렵다. 게다가 한동안 불도 꺼져 있어 기억에서 사라진 등대였다.

연평도 등대.
연평도등대.

다시 등대의 불을 밝히다

연평도에 등대가 설치된 것은 1960년 3월이다. 해발 105m에 높이 9.1m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지어졌다. 연평바다 조기잡이 어선의 바닷길을 안내해주고 안전한 항해를 돕기 위해 불을 밝혔다. 그때만 해도 많을 때면 조기어장이 형성되면 전국에서 400여 척이 몰려들었다. 

연평등대를 지키는 세 가족이 있었다. 그들은 빗물을 받아 식수로 해결하며 생활했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으니 그 삶이 얼마나 어려웠을까. 10여 년 쯤 불을 밝히다 등대 불빛이 침투하는 간첩들에게 위치를 알려주는 역할을 할 것을 우려하여 1974년 7월 불을 껐다. 그리고 1987년 4월 시설물이 폐쇄되면서 직원들은 철수하고 그곳은 등대공원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45년 동안 한 번도 불을 밝히지 못했다.

다시 불을 밝힌 것은 2019년 5월 17일이다. 매일 일몰 시간부터 일출 시간까지 15초에 1회 주기로 연평바다에 불을 밝힌다. 남북관계가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면서다. 다만 북쪽으로 새어 나가는 불빛을 차단하고 남쪽만 비추도록 했다.

불을 밝힌 연평도등대.
불을 밝힌 연평도등대.

선착장에 포크레인이 커다란 물건을 들어 올려 트럭에 실었다. 가까이 가보니 트럭에 가득 찰 만큼 커다란 그물뭉치였다. 그물에는 꽃게가 가득 걸려있었다. 작업장으로 옮겨 꽃게를 따기 위해서다. 바다에 나가 잡는 것도 힘들지만 꽃게를 그물에서 뜯어 내는 일도 힘들다. 꽃게 잡은 배가 들어오면 꽃게잡이 선주 집의 작업장에는 어머니들이 10여명씩 모여든다. 야간조업도 할 수 있을 만큼 남북관계가 하루속히 개선되길 기원한다. 서해 어장확대와 야간조업이 풀리면서 등대가 필요하다.

조기는 떠났고, 꽃게어장은 반쪽이다

연평도 식당이나 가정집에서 종종 옛날 조기파시 사진들이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960년 조기잡이를 위해 연평도로 몰려든 배들이다. 이렇게 배가 들어오는 날이면 연평도 선창 뒷골목은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붐볐다. 지금도 그 골목은 당시 흔적들이 편린으로 남아 있다. 지난 연평해전으로 무너진 집과 골목을 단장하면서 조기파시를 기억하는 사진과 그림이 그려졌다. 그 골목은 육거리도 있다. 얼마나 번화했는지 짐작이 가는 곳이다.

조선시대 연평바다에서는 어전으로 청어를 잡고 배로 조기를 잡았다. 연평어전은 1511년(중종 6년) 제안대군에게 하사된 이래 궁가의 소유였다. 어장은 궁가의 바다였고, 섬은 목장을 관리하는 사복시의 둔전이었다. 섬에 사는 백성들의 삶이 편안할 리 없었다.

1967년 연평도 조기파시(사진=옹진군 제공).
1967년 연평도 조기파시(사진=옹진군 제공).

18세기 연평도에 24곳의 어장이 있는데 그 중 주민이 운영하는 것은 고작 2기뿐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4월과 5월에는 전국에 1000여 척의 어선이 조기를 잡기 위해 몰려들었다. 하루 조기 위판고가 당시 조선은행의 하루 출납액보다 많았다고 하니 조기파시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당시 조기를 잡으면 간통에 넣고 간을 했다. 소금이 귀해 연평도에는 소금배가 자주 들어왔다. 연평도와 가까운 북한의 연백염전에서 소금을 가지고 왔을 수도 있다. 간이 되면 날씨 좋은 날이며 마을 앞 해변에 널었다. 지금과 달리 마을 앞 해변은 몽돌해변이었다. 달궈진 돌 위에서 금방 꾸덕꾸덕 말랐다.

지금은 제방을 쌓고 물길이 바뀌면서 뻘밭으로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몽돌해변이었다. 조기가 귀해지면서 김 양식과 굴 양식이 시작되었다. 지금도 개체굴 양식을 시도하고 있다. 이제 연평어민들이 기대는 것은 꽃게다. 이 꽃게는 노처럼 생긴 발을 가지고 있어 헤엄을 아주 잘 친다. 그들에게 NLL은 의미가 없다. 환경에 따라 북쪽으로 이동한다. 가두어 기를 수도 없다.

연평도는 서해5도의 하나로 NLL을 사이에 두고 황해도 해주시와 마주하고 있다. 그 사이에 수압도, 용매도, 장재도 등 섬들이 여러 섬이 있다. 이곳이 서해 최고의 꽃게어장이다. 망향비에 올라보니 그 바다에 붉은 깃발을 단 수십 척은 정박해 있다. 꽃게잡이 중국어선들이다. 

연평도 꽃게잡이 모습(사진=옹진군 제공).
연평도 꽃게잡이 모습(사진=옹진군 제공).

안보관광보다 평화여행을

남북관계가 평화로울 때는 연평도를 찾는 여행객들이 줄을 잇는다. 특히 주말이면 예약을 해야 배를 탈 수 있었다. 코로나19가 한창인 요즘에도 청정지역 연평도를 찾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여행객만 아니라 주민들도 남북관계가 좋아야 어장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고, 수산물을 뭍으로 보낼 수 있다.

연평해전 이후 안보관광은 더 구체화 되고 있다. 국민이나 여행객에게 반공의식을 고취하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주민들이나 여행객은 불안한 섬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연평도 섬정책도 이제 안보를 넘어 평화의 시선으로 살펴야 한다. 지속 가능한 섬을 위한 밑그림은 평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등대를 다시 밝힌 것처럼 전환이 필요하다.

일출과 함께 꽃게잡이 조업에 나선 연평도 어선들.
일출과 함께 꽃게잡이 조업에 나선 연평도 어선들.

10여 년 전 연평도에서 주민의 고기잡이 배를 탄 적이 있다. 당시 식당을 하는 주인은 낚시로 넙치를 낚았다. 그 어민은 연평도 사람들이 가장 행복할 때는 마음 편하게 조업을 할 수 있는 때라고 했다. 남북관계가 가장 좋았던 ‘햇볕정책’ 때가 조업을 하기 가장 좋았다고 기억했다. 그때는 멀리 북한군 함대를 만나면 서로 손을 흔들기도 했다고 한다.

가장 힘들었던 때는 바다에 나가지 못할 때, 바닷길이 막힐 때라고 했다. 남북이 긴장되고 바닷길이 막힐 때가 연평도 사람들이 가장 힘들 때라고 했다. 어렵게 잠자던 등대를 깨웠다. 하지만 반쪽만 불을 밝히는 외눈박이 등대가 되고 말았다. 하루빨리 남북관계가 개선되어 온전히 불을 밝히고 야간조업도 허용되길 바란다. 그 불빛과 함께 황금조기가 귀환하고 조기의 신 임장군을 맞는 배치기소리가 연평바다에 울려 퍼지길 기원한다.

김준

◆ 김준 섬마실 길라잡이

어촌사회 연구로 학위를 받은 후, 섬이 학교이고 섬사람이 선생님이라는 믿음으로 27년 동안 섬 길을 걷고 있다. 광주전남연구원에서 해양관광, 섬여행, 갯벌문화, 어촌사회, 지역문화 등을 연구하고 정책을 개발을 하고 있다. 틈틈이 ‘섬살이’를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며 ‘섬문화답사기’라는 책을 쓰고 있다. 쓴 책으로 섬문화답사기, 섬살이, 바다맛기행, 물고기가 왜, 김준의 갯벌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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