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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시골도시에서 만나는 불멸의 두 음악가

[정태남의 클래식 여행] 오스트리아/아이젠슈타트(Eisenstadt)

2020.10.07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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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주(州)인 부르겐란트(Burgenland)는 슬로바키아와 헝가리 국경과 맞닿아 있다. 주도(州都) 아이젠슈타트(Eisenstadt)는 수도 빈에서 남쪽으로 약 50km 떨어져 있고, 또 이곳에서 헝가리 국경과의 거리는 10km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아이젠슈타트의 구심점은 바로크 양식의 에스테르하지(Eszterházy) 궁이다. 아이젠슈타트와 이 일대는 막강한 헝가리계 유력 귀족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영지였다. 그런데 아이젠슈타트는 말이 주도이지 인구 1만 4000명 조금 넘는 조용한 시골도시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곳은 음악사에서 빛나는 두 사람의 위대한 음악가 요제프 하이든(1732-1809)과 프란츠 리스트(1811-1886)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리스트 기념상 앞에서 본 에스테르하지 궁. 하이든이 30년 동안 봉직했던 곳이다.
리스트 기념상 앞에서 본 에스테르하지 궁. 하이든이 30년 동안 봉직했던 곳이다.

하이든이라면 100곡이 넘는 교향곡을 쓴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리는데 에스테르하지 궁은 바로 그가 30년 동안 봉직했던 곳이다. 사실 그가 쓴 불멸의 작품 상당수는 이곳에서 활동하던 기간 동안에 작곡된 것이다. 하이든이 이곳에 처음 온 것은 29세였을 때였다. 그는 떠돌이 악단에 속해 있다가 모르친 백작의 오케스트라를 맡게 되었으나 얼마 후 재정 압박으로 오케스트라가 해체되고 말았다.

모르친 백작은 그를 에스테르하지 가문에 소개했다. 이리하여 1761년에 아이젠슈타트에 오게된 그는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오케스트라를 위해 일하면서 안정된 급료를 받았다. 그는 이곳에서 개인적인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는 없었지만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을 위해 일하는 덕택에 그의 작품은 가장 권위 있게 외부에 알려질 수 있었다. 사실 그가 아이젠슈타트를 떠났을 때 그의 이름은 이미 국제적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특히 영국 런던에서 그는 그곳 귀족들로부터 대대적인 환대를 받았다.

하이든을 기념하는 ‘하이든 와인’.
하이든을 기념하는 ‘하이든 와인’.

에스테르하지 궁 옆 길 건너편에는 하얀 대리석 좌상이 보인다. 프란츠 리스트(1811-1886) 기념상이다. 좌상 아래에는 ‘부르겐란트의 위대한 아들에게’라고 새겨져 있다. 리스트는 19세기 유럽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난 기교를 자랑하는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날렸다. 1840년대의 비평가들은 그를 음악역사상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손꼽았다.

그는 37세 이후부터 연주가보다는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피아노 명곡과 오케스트라 명곡을 남겼다. 유럽 음악계의 황제나 다름없던 그는 생의 후반에는 신앙에 심취하여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사제서품을 받은 다음부터 영혼을 울리는 종교적인 작품을 쓰기도 했다. 

사제복 차림의 리스트 기념상.
사제복 차림의 리스트 기념상.

리스트 기념상은 1936년 탄생 125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것인데 보통 사람 눈높이 정도 위치에 앉아 있는 말년의 모습이다.

순박하고 평화스러운 아이젠슈타트 사람들은 제왕과 같은 위압적인 모습보다는 겸허한 사제 모습의 리스트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하이든과는 달리 리스트는 이곳에서 활동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아버지 아담 리스트는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토지 관리인으로 있으면서 하이든이 지휘하는 에스테르하지 가문 오케스트라에서 첼로를 연주하곤 했다.

그 기간 동안 아담 리스트는 음악가로서 큰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이젠슈타트 근교 에스테르하지 영지 라이딩(Raiding)으로 전근되었다.

당시 그곳은 헝가리 땅으로 헝가리식 지명은 도보랸(Doborjan)이었다. 프란츠 리스트는 바로 이 조그만 마을에서 하이든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인 1811년에 태어났다.
 
어린 리스트는 6살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자마자 신동으로 주목받았다. 아버지는 자신이 이룰 수 없는 예술가로서의 야망과 사회적 지위를 어린 아들을 통하여 구현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리스트는 9살이던 1820년에 프레스부르크(오늘날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에서 첫 정식 독주회를 가졌는데, 연주가 끝난 후 그의 아버지가 금전적 여유가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곳 귀족들은 즉시 기부금을 모았고, 더 나아가 어린 리스트를 6년 동안 후원하기로 했다. 이에 힘입어 그의 아버지는 아예 직장을 포기하고 바로 그해 말 아들의 교육에만 전념하기 위해 에스테르하지 영지를 떠나 제국의 수도 빈으로 이주했다.
 
빈에서 어린 리스트를 처음 가르쳐본 체르니는 “너는 우리시대에 어느 누구보다도 더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겠구나”라고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그의 말은 빈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만약 어린 리스트가 브라티슬라바 귀족들의 후원을 받지 못했더라면, 또 스승 체르니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또 아버지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과연 위대한 음악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을까? 

에스테르하지 궁의 정원. 리스트의 아버지는 에스테르하지 가문 영지에서 일했다.
에스테르하지 궁의 정원. 리스트의 아버지는 에스테르하지 가문 영지에서 일했다.

에스테르하지 궁 안에는 하이든의 이름을 딴 하이든잘(Haydensaal)이 있다. 음향이 뛰어난 이 연주 홀에서 열리는 음악회 프로그램을 보면 하이든과 리스트의 작품이 주축을 이룬다. 이 두 불멸의 음악가의 존재는 이 시골도시가 전 세계에 자랑하는 가장 값진 문화 자산임에 틀림없다.

정태남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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