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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은 시대정신을 외면하지 않는다

2018.11.30 김종면 저널리스트/콘텐츠랩 씨큐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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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패션브랜드 ‘돌체앤가바나’는 왜 영혼 없는 기업이란 비난을 자초할까. 이번에 논란이 된 중국 상하이 패션쇼 홍보 영상을 보면 인종차별적인 요소가 있는 게 사실이다. 동양계 여성이 헤픈듯한 웃음을 지으며 어색한 젓가락질로 피자를 먹으려 하지만 여의치 않다. 그때 “이 작은 막대기로 위대한 이탈리아 피자를 먹는 방법을 설명해주겠다”는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이 문제의 영상이 공개되자 중국 네티즌들이 들고 일어났다. 젓가락을 사용하는 중국 문화를 비하하고 유럽인의 우월함을 과시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정말 유럽인들의 ‘우월 컴플렉스’의 발로일까. 분명한 것은 인종차별은 반문화적인 폭거요 문명국의 수치라는 점이다.

자사 제품에 대한 대대적인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비난 여론이 들끓자 돌체앤가바나는 결국 사과했다. “우리는 늘 중국에 푹 빠져있었다”고 말하며 이해를 구했다. 그런데 동양 문화에 대한 이해는 어찌 그리 천박한지, 사과의 말이 오히려 진정성을 의심케 한다. 돌체앤가바나가 인종차별적 행태로 논란의 중심에 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6년에도 손으로 게걸스럽게 스파게티를 먹는 동양인과 그렇지 않은 백인의 모습을 대비시킨 영상으로 물의를 빚었다.

서구인들의 동양관을 비판한 대표적 학자인 에드워드 사이드가 주장하듯 서구는 동양을 재현할 때 늘 ‘타자’로 규정하는 것인가. 세계가 하나가 된 이 지구촌 시대에도 오리엔탈리즘은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인가. 동양인에 대한 묘사가 풍자를 위한 익살스런 패러디 수준을 넘어 노골적인 인종차별의 지경까지 나아간다면 그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질적으로 고도화된 인종차별적 환경 속에 살고 있다. 지난 8월 발표된 유엔특별보고서에 따르면 2012년부터 트위터상의 백인우월주의 운동은 6배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모티콘과 게임을 이용하는 ‘디지털 나치’까지 활개를 치고 있다. 진화하는 온라인·모바일 환경에 따라 인종차별주의자들의 활동도 한층 업그레이드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모바일 앱 등을 통해 유통되는 인종차별 영상에 대해서는 처벌할 방도가 마땅치 않다. 이러한 국경 없는 ‘유해’ 콘텐츠에 누구든 노출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돌체앤가바나의 거듭된 동양 비하 행위 또한 그들의 양식에 호소할 뿐, 어떻게 규제를 할 수도 감독을 할 수도 없다. 아무리 유명 브랜드라 해도 ‘도덕적 패자’로 낙인찍히는 순간 그것은 한낱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1915년 개봉된 최초의 스펙터클 대작 영화 ‘국가의 탄생’은 연극을 동영상으로 옮긴 데 불과하던 초기 영화의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미국의 데이비드 그리피스 감독은 이 작품으로 ‘현대영화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다. 배우 찰리 채플린은 그를 우리 모두의 스승이라고 했다.

그러나 ‘국가의 탄생’이 백인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왜곡과 허위의 영화라는 오명을 덮지는 못한다. 그리피스는 백인들의 비밀결사인 KKK단을 정의의 십자군처럼 그렸다. 반면에 흑인들은 백인 여성을 겁탈하고 흑인 인구를 늘려 종국에는 흑인 독재국가를 건설하려는 악마로 묘사했다. 반짝이는 것이 다 금은 아닌 것이다.

인종차별 문제와 관련해서는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도 참고할 만하다. 이방인이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비극 ‘오델로’를 보면 당시의 인종적 편견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무어인인 오델로를 당대의 사람들이 혐오하던 전형적인 인물로만 그리지 않았다. 그들의 인간적인 미덕과 고통도 아울러 부각시켰다. 무대연극이 전성기를 맞던 엘리자베스 시대 무대에 등장한 무어인들이 대부분 악당으로 그려진 것을 감안하면 ‘오델로’는 이러한 인종적 가치 기준에 대한 대담한 극적 반전인 셈이다.   

돌체앤가바나가 진정 명품으로 남고자 한다면 이제라도 끊이지 않는 ‘인종 구설수’에 대해 진지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누구도 인종차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최근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펴낸 천재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여행일기(The Travel Diaries of Albert Einstein: The Far East, Palestine, and Spain, 1922-1923)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은 한때 인종차별주의적이고 외국인혐오적인 성향을 보였다.

이 일기에서 아인슈타인은 중국을 ‘짐승 떼 같은 별난 나라(peculiar herd-like nation)’라고 하는가 하면, 중국인을 사람이라기보다는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자동제어 기구(automations)’ 같다고도 했다. 영국 공영방송 BBC도 지적하듯 아인슈타인은 인종주의자로서의 정형화된 모습(racist stereotypes)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러나 나치 정권에 반대한 아인슈타인은 미국으로 망명한 뒤에는 인종차별에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의 민권운동도 적극 지지했다. 1946년 펜실베이니아의 링컨대에서 행한 연설에서는 인종주의를 ‘백인병(a disease of white people)’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잘못을 고치는 데 늦은 법은 없다. 최근 미국 공연예술계는 동양 비하의 혐의가 짙은 이른바 ‘아시안 스테레오타입’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6년 브로드웨이에서 상연된 뮤지컬 ‘캣츠’에서는 아시아인을 경멸하는 ‘칭크스(Chinks)’라는 속어가 나와 인종차별 지적을 받아온 노래 ‘그라울타이거의 마지막 접전’이 삭제됐다.

미국 발레계에서 동양인을 희화화하는 안무와 의상, 분장을 개선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뉴욕시티발레단이 고전발레 ‘호두까기 인형’에서 원뿔 모양의 베트남 전통 모자를 쓰고 콧수염을 붙인 무용수가 어릿광대처럼 춤을 추는 우스꽝스런 장면 등 인종차별적인 요소를 덜어낸 것은 주목할 만하다.

돌체앤가바나는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동양 비하라는 케케묵은 인종차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기존의 명성을 유통시키는 데만 안주한다면 명품은 언제라도 소비자본주의 사회의 ‘키치(kitsch)’로 전락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돌체앤가바나의 동양인 비하 논란을 중국만의 문제로 볼 것은 아니다. 인종차별 문제는 동양과 서양, 피부 색깔과 상관없이 어느 곳, 어느 방향에서든 일어날 수 있다. 중국 또한 2016년 흑인 남성이 세제를 통해 깨끗한 중국인 꽃미남으로 거듭난다는 내용의 인종차별적 세제업체 광고로 비난을 산 적이 있다. 이번 논란은 중국인 특유의 ‘몰아치기식’ 애국주의 정서로 증폭된 측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백인의 우월함을 믿은 ‘제국주의자’ 러디어드 키플링은 일찍이 “동은 동, 서는 서, 둘은 영원히 만날 수 없으리”라고 읊었다. 그러나 세계 방방곡곡을 누빈 ‘평화주의자’ 백남준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1986년 미국과 일본, 한국을 동시에 위성으로 연결하는 ‘바이 바이 키플링’이란 작품을 내놓았다. 어느 쪽이 더 역사에 대한 혜안과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주는가.

동과 서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은 비디오작품 뿐만이 아니다. 패션이야말로 이미지 하나만으로도 인간의 내면을 파고들 수 있는 만국 공용어다. 그렇기에 돌체앤가바나의 문화적 추락은 더욱 안타까운 데가 있다. 명품은 물질이 아니라 정신에서 나온다. 명품은 시대정신을 외면하지 않는다. 이것은 평범한 만큼이나 소중한 진리다.

김종면

◆ 김종면 저널리스트/콘텐츠랩 씨큐브 수석연구원

서울신문에서 문화부장, 수석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서울여자대학교 국문과 겸임교수로 세계문학 등을 강의했다. 국민권익위원회와 대통령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지금은 여러 매체에 다양한 성격의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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