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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눈동자 입술은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시가 된 노래, 노래가 된 시] (22) 박인희의 ‘세월이 가면’

2022.11.29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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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박인환 시, 이진섭 작곡, 박인희 노래)

이 노래가 귓가에 맴도니 이제 가을도 떠나가나 보다. 유튜브를 뒤져 젊은 날의 박인희를 만난다. 정말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다. 청아(淸雅)하다는 말 외에 마땅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국어사전에는 ‘속된 티가 없이 맑고 아름답다’라고 풀이돼 있다.

50년대 전후 시대에 함께 명동 술집 ‘은성’을 드나든 박인환(오른쪽)과 김수영 시인. 둘 다 당대의 미남이었다.
50년대 전후 시대에 함께 명동 술집 ‘은성’을 드나든 박인환(오른쪽)과 김수영 시인. 둘 다 당대의 미남이었다.

박인환(1926~1956)은 잘생긴 얼굴, 짙은 눈썹, 훤칠한 키에 낭만을 먹고 사는, 전후 50년대 문인 가운데 최고의 댄디 보이였다. 강원도 인제 산골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그는 20대 초반인 1949년에 김수영 등 네 명과 함께 합동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며 모더니즘의 기수로 우뚝 섰다.

‘세월이 가면’을 말하려면 그 시절 그 장소로 돌아가야 한다.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1956년 3월 초봄 어느 날. 박인환은 망우리에 있는 첫사랑 묘지에 다녀왔다. 그 다음날 명동의 문인 사랑방 ‘명동싸롱’에서 허전한 가슴을 달래던 그는 대폿집 ‘은성’으로 발길을 옮겼다. 극작가 이진섭, 언론인 송지영, 가수 나애심(1930~2017, 가수 김혜림 어머니)이 앉아 있었다.

술기운이 거나해지자 그들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했으나 나애심은 손사래를 쳤다. 이진섭이 박인환에게 “시를 써주면 내가 즉석에서 작곡해서 나애심에게 부르게 하자”고 했다. 노래는 이렇게 탄생했다. 

‘명동백작’으로 불린 작가 이봉구의 회고와 EBS 드라마 ‘명동백작’ 등에 나온 이야기다. 그런데 그 후의 여러 증언에 따르면 실제로는 박인환과 이진섭이 명동 분위기에 어울리는 샹송 같은 노래를 만들기로 의기투합해서 박인환이 시를 써왔고 이진섭이 곡을 붙였다는 것이다.

은성의 주인은 탤런트 최불암의 어머니 이명숙(1986년 작고)씨였다. 영화 제작자였던 남편이 과로로 숨지자 외아들을 키우기 위해 주점을 열었다. 이봉구, 김수영, 변영로, 전혜린, 오상순, 입구 쪽에 서서 막걸리 한 잔 사줄 사람을 기다리던 천상병 등 문인과 화가, 성악가, 영화인들이 단골이었다.(명동파출소 옆 골목에 은성을 재현한 술집 ‘명동백작5060’과 표지석이 있다.)

은성에 다녀온 열흘 후쯤 박인환은 이상 시인 추모의 밤에 가서 폭음했다. 그리고는 세종로 집에 돌아와 가슴을 쥐어뜯으며 “생명수를 달라!”는 말을 남긴 채 눈을 감았다. 심장마비였다. 만 30세였다. 그는 첫사랑이 누워있는 망우리에 묻혔다. 모윤숙이 추모시를 낭독하는 동안 동료 시인들은 생전의 그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조니워커와 카멜 담배를 함께 묻었다. 운명을 예감했던 것일까. 마지막 길에 첫사랑의 무덤을 어루만지며 작별을 고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때 이미 ‘세월이 가면’의 초고가 마음에 새겨졌을지도 모른다.

두 달 후 나애심이 이 노래를 발표했다. 한동안 잊힌 이 노래는 20년 후인 1976년 박인희가 되살려 큰 사랑을 받는다. 그해 박인환의 유족은 20주기 추모 시집 ‘목마와 숙녀’를 펴냈고 ‘세월이 가면’은 여기에 처음 실린다. 짧은 서른 생을 살고 세상과 작별한 박인환은 출중한 포크싱어 박인희를 통해 부활했다.

박인희의 청음(淸音)과 극도의 절제는 박인환 시의 정서와 잘 어울린다. 쓸쓸하지만 아름답다. 아름답지만 서늘하다.

‘세월이 가면’이 실린 박인희 ‘고운노래모음 제3집’(1976년)
‘세월이 가면’이 실린 박인희 ‘고운노래모음 제3집’(1976년)

전쟁과 가난은 모든 것을 앗아갔다. 가족을, 연인을, 생의 빛나는 의지를 잃었다. 설움과 불안과 울화가 스멀대던 때였다. 그 시절 명동은 허기진 예술가들의 비상구이자 해방구였다. 야만의 시대이자 낭만의 시대였다. ‘그 눈동자 입술’로 상징되는 그 아름다운 무엇은 세월이 가도 가슴에 남았다. 그런데 그 가슴은 서늘하다. 상실의 가슴이므로 따스하지 않고 서늘하다. 이 노래시의 정수를 꼽으라면 ‘내 서늘한 가슴’이다. 전후의 그 시대엔 누구나 이런저런 상처를 안고 살았다. 

박인희는 숙명여대 불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1970년에 혼성 듀엣 뚜아에무아로 데뷔했다. 2년 후 솔로가 된 그는 ‘모닥불’, ‘약속’, ‘하얀 조가비’ ‘봄이 오는 길’ 등 시적이고 섬세하고 기품 있는 명곡들을 남겼다. 지성파 포크 가수, 그 시절 드문 여성 싱어송라이터로 ‘노래하는 시인’으로 불렸다. 어느 노래나 가사나 멜로디에 불필요한 겉멋이나 기교가 없다. 지금 들어도 전혀 옛스럽지 않다.

그는 짧게 활동하고는 돌연 미국으로 떠났다가 35년 만인 2016년 서울서 컴백 공연을 했다. 71세 나이에도 여전히 소녀 같았다.

2016년 3월 서울 그랜드힐튼호텔에서 35년 만의 컴백 회견을 갖는 박인희. 그때 71세였다.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6년 3월 서울 그랜드힐튼호텔에서 35년 만의 컴백 회견을 갖는 박인희. 그때 71세였다.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그는 인터뷰에서 ‘세월이 가면’ 노래에 대해 “팬들은 이 곡을 들으면서 누군가의 노래, 누군가의 시로 기억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젊은 날, 가버린 사랑, 이루지 못한 것들을 떠올리는 것 같아요. 이 곡이 던지는 인간의 숙명적인 의미에 고개를 숙이고 옛날을 추억하지요”라고 말했다.

박인희가 낭송해 음반으로 내놓은 박인환의 다른 시 ‘목마와 숙녀’는 이 노래의 후렴 같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이제 우리는 작별해야 한다/…/인생은 외롭지도 않고/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세월이 가면’을 듣고 있자면 연상되는 것들이 있다.

프랑스 시인 아폴리네르는 사랑했던 화가 마리 로랑생과 헤어진 후 ‘미라보 다리’를 지었다.

“미라보 다리 아래 강물은 흐르고/우리들 사랑도 흘러간다/…/흐르는 강물처럼 우리들 사랑도 떠나가네/삶처럼 느리게/희망처럼 격렬하게/…/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무네”

26세로 요절한 차중락(1942∼1968)의 엘비스 프레슬리 번안곡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도 들어야 한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면/ 따스하던 너의 두 뺨이 몹시도 그리웁구나/…낙엽이 지면 꿈도 따라 가는 줄 왜 몰랐던가.”

박인환이 세상을 떠난 그해 추석 그를 아끼던 선후배들이 무덤 앞에 아담한 비석을 세워주었다. 비석 앞면에는 ‘세월이 가면’ 첫 구절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네’를 새겼다.

한기봉

◆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과 신문윤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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